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백 권씩 쏟아지는 책 가운데 선택의 갈등을 벗어나려는 방편으로 신문의 신간 소개 혹은 저명한 분의 추천사, 베스트셀러 순위에 의존하기도 한다. 타인에 의한 인정이 갈등 상황에 대한 손쉬운 해결의 변명이 되면, 무엇보다 선택한 사람은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돌릴 수 있어 편하다. 며칠 전에 읽은 <조선의 가족 천개의 표정 / 이순구 / 너머북스> 역시 타인의 인정에 기대어 선택했다. 인문학 관련 팟캐스트에서 대표적인 암기 과목이라고 오해받는 역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소개했다.
역사를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역사는 권력관계의 산물이며 당대 힘을 가진 자의 기록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권력관계는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하니 그때마다 권력을 가진 집단의 시대관, 인간관, 지배이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권력집단의 목소리는 비슷하게 기록되었고, 읽는 이의 눈에는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으로 비쳐 역사를 반복하거나 순환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렇게 역사를 보면, 힘없는 개인은 무력하기 그지없고 역사를 공부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기록의 수단은 문자언어이고, 역사상 권력의 언어에서 소외된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제 목소리를 담을 수 없었던 집단은 ‘여성’이었다. 오죽하면 역사는‘Hi(s)story – 그의 이야기’일까. 그러나 이 책은 ‘그의 이야기’ 가운데 조선 시대 양반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 안에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당대 5%에 불과했던 ‘특별한 이’들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소개하는 ‘여성’의 삶을 조선 시대 전체 여성의 삶과 비교해서는 안 될 것이다.
16 ~ 17세기 전반까지 조선은 고려 시대 삶의 방식이 혼재한다. 그래서 혼인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 하여 여자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신랑은 자신의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형태였다. 시집살이가 없었고, 딸도 제사를 지내고 재산을 똑같이 상속받아 결혼 전 친정집에서 누렸던 딸의 권한을 계속 유지했다.
양반의 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일종의 세 불리기였다. 그러니 최대한 경제적, 문화· 사상적 배경이 맞는 가문끼리 인연을 맺었고, 남편과 아내의 공간도 분리되어 갈등의 요소를 줄였다. 더구나 힘 있는 계층의 여성이니 그에 상응하는 적처(嫡妻)로서 배타적 권리도 누릴 수 있었다. 신사임당이 ‘어진 어머니’로 부각된 것은 이율곡을 계승한 송시열에 의해 예술가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삭제되고부터였다. 불리는 이름에 걸맞게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며느리’로서 살 때, 안정적인 사회가 된다는 공자의 ‘정명(正名)’은 21세기에도 유효하게‘어머니와 아내의 이름으로’ 여성을 옥죄고 있다. ‘~ 답게’ 산다는 것은 호명된 이름에 충실하게 답하는 것으로 개인의 개성이나 다양한 차이는 배제된다.
그러나 책 속의 여성은 혼인관계에 의해‘어머니’와 ‘며느리’로 불리기 전 아버지의 ‘딸’로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지은이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래서 조선의 양반 여성은 아버지의 딸로서 가문의 이익을 위해 남편과 자식도 배반하는 순간을 맞게 되며, 대표적으로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마치 ‘반정’이 단지 왕의 얼굴이 바뀌는 것에 불과하듯 ‘아버지’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으로 변한 관계의 대상에서 힘은 여전히 남성에게 속한다.‘아버지의 딸’이란 배경은 대통령이 탄생하는 데도 신화로써 이야기를 생산하여 딸과 아버지를 동질화시킨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딸이 며느리와 아내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여성은 남성과 관계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성이 아니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철학자의 말이 떠올라서 씁쓸함을 떨칠 수 없었다.
조선 시대 양반 계층의 여성은 권력층으로서 권리도 누렸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만만치 않았다. 전 시대 고려와 비교하면 후기 조선으로 갈수록 여성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다. 역사는 변화한다.‘더 나은’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조선 여성의 삶은 고려보다 퇴보했다. 하지만 ‘도전과 응전’이란 서양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 여성은 조선이란 시공간 안에서 나름의 응전을 도모했다. 유교 이데올로기를 체화해서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실천했는가 하면, 기생이란 천한 신분을 십분 활용해서 예술로 저항하거나 남성을 희롱함으로써 불합리를 몸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역사학자 주경철 선생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이 없어서는 안 되고, 역사학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려는 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역사 공부는 몇 마디 말로 요점 정리한 과거 사실을 읽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우리 나름대로 다시 해석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 비록 권력의 언어로 쓰인 역사라도 행간을 읽고, 상상하고, 오늘의 우리 삶과 견주어 ‘해석’하는 것은 역사를 새롭게 쓰는 것이며 이른바‘대화’하는 것이다. 이 책이 썩 만족스러운 선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역사는 쓰는 사람의 ‘해석’뿐만 아니라 읽은 이의 ‘해석’도 한 몫을 차지한다. 저자의 해석과 독자의 해석이 만나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불만족스러운 책을 통해 느꼈다.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을 만나다
여성사와 가족사를 전공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조선시대에 중국과 같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시행은 결국 실패했다고 간주하며 조선의 여자들은 오랜 기간 남자와 동등한 재산권을 통해 특별한 경제 능력을 보유했으며 이는 세계 어디에도 흔치 않은 일 이라 지적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자들이 통장관리를 하는 재산 관리 감각이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에는 적처와 적자, 종부, 종손, 양자, 서얼, 첩, 기생 등 다양한 가족들이 등장한다. 여기 사연의 주인공들 중에는 이른바 좀 성공한 사람도 있고 영 일이 잘 안 풀린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처 방식을 찾고 또 그것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그것만큼은 잘나가던 사람이든 못나가던 사람이든 서로 다르지 않았다. 사연들은 애틋하다. 그런데 그 사연들은 어쩐지 현재 우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종의 공감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보다도 감동적이다.
머리말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
1부 장가들기, 남자가 움직이는 혼인
김종직은 왜 밀양에서 태어났을까?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인가?
왜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더 많이 키우는가?
2부 처가 또는 외가의 위력
인목대비는 왜 아들보다 친정 집안을 선택했을까?
왕실의 외가, 단지 외척인가 정치적 파트너인가?
‘칠거지악’으로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적처, 적자들의 배타적 권리
조선에서는 사위도 연좌제에 걸릴까?
한때의 전통이 다른 시절엔 금기가 되다
3부 집안의 중심, 여자
딸들은 상속받은 재산을 결혼 후에도 소유했을까?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다
맏며느리의 저력
투기도 부덕도 여자의 생존 전략
중국의 전족, 조선에는 왜 없었을까?
신여성 인수대비
정부인 안동 장씨에 대한 오해
큰물에서 놀았던 소현세자빈 강씨
강정일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특별꼭지 조선의 혼인이 가족에 미친 영향
4부 가족들의 생활상
세 번 결혼한 양반은 진정 행복했을까?
종손이라는 것
사랑은 조선시대에도 불가해였을까?
사랑과 우정 사이
안 예쁜 여자는 없다
청과 조선의 경계, 그 땅의 풍속
우리는 시험을 좋아한다
고려와 조선이 타협한 장례 문화
왕실 제사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다
5부 조선 가족의 마이너리티
그 많은 홍길동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자 노수, 족보에서 ‘서’ 자를 빼다
과부는 재가할 수 없다
양반과 기생,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기생 석벽, 양반의 첩이 되다
기생 ‘머리 올려주기’의 진실
조선의 여성들, 불교의 명맥을 잇다
6부 우리가 도덕성에 열광하는 이유
어우동의 죽음, 도덕 사회로 가는 발판이 되다
어느 열녀의 퍼포먼스
화순옹주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언제까지 도덕성 경쟁을 해야 하는가?
강정일당의 도덕성 열망
18세기 말에 쏟아진 간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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